설악의 시간여행 12 - 청간정

청간정은 있건만 만경대, 만경루는 어디에
등록일 2016-06-17 00:00:00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신고하기 기사글확대 기사글축소 쪽지를 보낼 수 없습니다. 문의를 받지않습니다 프린트하기

문화재와 함께 하는 설악의 시간여행 12
 


청간정은 있건만 만경대, 만경루는 어디에
청간정 대표 현판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동해안에서 바다 전망이 가장 좋은 곳이 어딜까? 예로부터 관동팔경을 바다 전망이 좋은 곳으로 손꼽는데, 팔경 중에서도 서로 제일경을 다툰다. 그 중 한 곳이 바로 고성에 자리잡은 청간정이다. 청간정은 우리지역의 문화재 중 문학작품에 가장 많이 언급된 명승지임에는 틀림없다.
고성(高城)을 저만 두고 삼일포 찾아가니 / 새긴 글은 완연한데 네 신선 어디 갔는고 / 예서 사흘 머문 후에 어데 가 또 머물고 / 선유담, 영랑호, 거기나 가 있는가 / 청간정, 만경대 몇 곳에 앉았던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 중에서 청간정 관련 내용이다. 송강 정철은 선조 13년인 1580년 강원도 관찰사로 원주에 부임하여 그해 3월 내금강과 외금강, 해금강과 관동팔경을 두루 유람하고 뛰어난 경치와 감흥을 관동별곡을 통해 표현하였다. 관동별곡에는 선유담과 영랑호, 청간정과 만경대가 함께 언급되고 있다. 다른 곳은 다 알만한데 만경대는 어디인가? 우리의 기억 속에 만경대는 남아 있지 않다.


 

2012년 올해 새롭게 해체복원한 청간정.

2012년 올해 새롭게 해체복원한 청간정. 



겸재 정선의 청간정과 강세황의 청간정

청간정 화장실 담벼락에는 두 폭의 청간정 그림이 설명과 함께 그려져 있다. 겸재 정선의 청간정과 강세황의 청간정. 두 그림 속에 만경대의 존재가 확인된다.

우리나라 진경산수화로 유명한 겸재 정선이 1738년 제작한 <관동명습첩>에 청간정의 풍경이 담겨 있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청간정은 높은 언덕이 아니라 바닷가에 인접해 들어서 있다. 그리고 바로 인접한 남쪽에 청간정보다 한층 더 높고 규모가 큰 정자(만경루로 추정)가 서 있다. 청간정과 인접한 바닷가에 외따로 높이 솟은 기암절벽 봉우리와 정상에 소나무 몇 그루가 돋보인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암절벽 사이로 가파른 계단길이 보이고, 정상의 소나무 사이에 세 명의 사람이 보인다. 차를 마시는지 바둑을 두는지 두 명이 마주보고 앉아 있는 풍경이다. 마치 신선의 세계를 한 폭의 그림에 담아 놓은 듯하다. 바로 이 기암절벽의 봉우리가 만경대라는 것이다. 만경대는 높이는 수십 길에 이르고 바위에 파도가 부딪쳐 눈송이처럼 흩날려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겸재 정선의 관동명습첩 청간정.

겸재 정선의 관동명습첩 청간정. 



또 다른 그림 한편을 보자. 강세황의 청간정 그림에서도 청간정은 언덕 아래 바닷가에 다른 정자와 함께 자리 잡고 있고 인근 바닷가에 기암절벽의 봉우리가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있다. 청간정 인근에는 청간역 건물과 마을 인가가 보인다. 강세황의 청간정 그림과 똑같은 그림이 있다. 단원 김홍도의 금강사군첩에 있는 청간정 그림이 그것이다. 구도가 강세황의 그림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심지어는 그림 속의 모든 사물의 모양도 일치한다. 44살인 단원이 1788년 정조의 명을 받아 금강산을 화폭에 담았다는데 당시 76세인 스승 강세황도 함께 갔다고 한다. 둘 중 한 명이 먼저 청간정을 찾아가 그림을 그리고, 다른 사람이 따라 그리지 않았나 싶다. 그렇다면 김홍도의 그림이 먼저이지 않을까 싶다.
 


김홍도의 금강사군첩에 있는 청간정
 


만경대는 청간정에 앞서 많은 기록에서 확인된다. 고려말 안축과 이곡 등의 시에서도 만경대가 확인되고 있으며, 조선시대 지리지인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택당 이식이 간성현감으로 있을 때 만든 수성지에서도 확인이 된다.

만경대의 존재에 대해 고성군 향토사학자 김광섭씨는 예전의 청간정과 만경루, 만경대가 지금의 군사보호구역인 군부대 안에 함께 있었다고 한다. 만경루는 1893년 큰비로 무너져 내려 중건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수성읍지에 남아 있고 청간정은 1928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중수했다고 한다. 군사보호구역내 있어 일반인들이 들어가 볼 수 없는 만경대는 나지막한 돌산으로 변해버렸으며, 바다를 향한 석벽에는 봉래 양사언의 필적 ‘만경대(萬景臺)’가 초서체로 적혀있다고 한다. 만경대에서 바다 방향으로 바위 하나가 있는데 이곳에는 우암 송시열이 쓴 ‘청간정(淸澗亭)’ 암각서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는 것이다.

바닷가 지형의 변화로 만경대는 모래에 파묻혀 낮은 구릉으로 변하고, 만경루은 사라졌다. 청간정은 원래 위치에서 지금 위치로 옮겨져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정선의 화폭 속에 나온 절경의 청간정을 보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쉽기만 하다.
 



2012년 7월 해체복원작업 거쳐 다시 중수

관동팔경의 하나인 청간정은 지난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되어 있어 보존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바위 위에 얹혀진 초석과 목조의 몸체, 기와 지붕이 주변 자연과 잘 아울린다는 평을 받고 있다.

창건연대와 건립자는 알 수 없으나 1520년 중종 15년에 간성군수 최청이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수차례 중수를 거쳤으나 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노후되고 1991년 불타버려 10여개의 돌기둥만 남아 1928년 토성면장 김용집의 발기로 현재의 위치로 옮겨 중수되었다. 이후 한국전쟁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1953년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1군단과 민간이 힘을 모아 다시 중수하게 되었다. 이후에 1980년 최규하 대통령의 지시로 해체 보수되어 공원화되었으며, 1997년 산불로 정자 난간 일부가 불타 정비했다. 누각이 기울어지는 등 안전에 문제가 있어 해체 복원작업을 거쳐 2012년 올해 7월 정자를 다시 중수했다.

청간정을 찾을 때 내다보는 바다 풍경도 좋지만 누각에 걸려있는 각종 편액을 둘러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청간정의 현판은 이조 현종 때 우암 송시열이 좌상으로 재직시 이곳에 들러 친필로 썼으나 유실되었다고 한다. 청간정에서 이승만, 최규하 두 전직 대통령의 친필을 볼 수 있다. 1953년 고 이승만대통령이 친필로 쓴 청간정 현판이 누각 안쪽에 걸려있으며, 1981년 4월 최규하 대통령이 청간정의 절경을 본 감상을 적은 편액도 걸려 있다.

‘악해상조고루상 과시관동수일경(嶽海相調古樓上 果是關東秀逸景), 설악과 동해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옛 루에 오르니 과연 관동의 빼어난 경치로다.’

아울러 택당 이식(1584~1647)의 7언 절구와 관암 홍경모(1774~1851)의 유람기, 1953년 청파 전형윤이 쓴 중수기를 비롯해 올해 중수를 기념한 새로운 중수기가 한편 더 걸렸다. 이 중수기는 서예가 혜풍 김광희가 글을 쓰고 고성의 각자장 이창석이 각을 하였다.

청간정 현판과 편액을 둘러보면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된다. 이승만 전대통령의 친필 현판은 누각 안에 걸려 있는데, 정작 청간정를 대표하는 현판은 누가 썼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다. 확인 결과 누각 안에 걸린 1953년 중수기를 쓴 청파 전형윤이 쓴 글자로 확인되었다.

청파 전형윤은 함남 북청 출신으로 1953년 청간정을 중수할 때 육군 중령으로 1군단 민사참모를 맡고 있었다. 당시 1군단 최홍희 소장과 전형윤 중령도 모두 서예에 일가견이 있었다고 한다. 고 전형윤은 1970년 우리나라 최초로 서도 이론집인 서도대의(書道大義)를 펴낸 바 있으며, 이후에는 서울서 북청 출신 서화전을 연이어 개최하기도 했다. 입상해 이름을 내는 게 싫어서 국전에 참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북에 가족을 두고 내려온 실향민 출신으로 속초 출신의 부인과 결혼하여 서울서 살았으나 말년에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지조를 잃지 않았다고 전한다.

영북 지역 명승을 대표하는 청간정. 문화재는 현재의 모습만이 아름다움의 모든 것은 아니다. 고려 말부터 수백년 동안 많은 명사들이 남긴 시와 글, 그림, 만경대와 만경루와 함께 이어온 내력을 소개하는 책자 한 권 조차 현지에서 찾을 수 없다는 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엄경선(프리랜서 기자) 2012년 11월 5일자 설악신문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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