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의 시간여행 10 - 비운의 사찰 건봉사

분단 아픔 안고 통일을 염원하다
등록일 2016-06-15 00:00:00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신고하기 기사글확대 기사글축소 쪽지를 보낼 수 없습니다. 문의를 받지않습니다 프린트하기

문화재와 함께 하는 설악의 시간여행 10
 

비운의 사찰 건봉사

분단 아픔 안고 통일을 염원하다

근현대사를 지내면서 가장 큰 비운을 겪은 곳이 어디일까? 바로 우리나라 최북단에 자리잡은 건봉사가 아닐까 싶다. 고성군 냉천읍 민통선 바로 앞에 있는 천년 고찰 건봉사는 6.25 전란으로 폐허가 된 사찰이다. 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다 되어가고 있지만 아직 사라진 건물이 다 복원되지 못해 전쟁으로 인한 건봉사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건봉사는 그 아픈 상처 때문에 더욱 간절한 통일염원의 사찰이기도 하다.

서기 520년 신라 법흥왕 7년에 아도화상이 원각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천년고찰, 세조임금이 원당(願堂)으로 삼은 절로 숭유억불의 탄압에도 3,183칸에 이를 정도로 번성했던 대사찰, 국내 염불만일회의 효시를 이룬 사찰,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700여 승병을 일으킨 호국사찰, 사명대사가 일본이 빼앗아간 부처 진신치아사리를 되찾아와 모신 적멸보궁 사찰.  수많은 수식어가 붙는 건봉사는 우리나라 불교를 대표하는 사찰이었다. 
 

건봉사 불이문


 
6.25 전란에 모든 전각 잃고 폐허로

일제 침략기에도 건봉사는 굳건하게 조선불교의 중심 역할을 해냈다. 전국 31본산의 하나로 신흥사, 낙산사 등 9개의 말사를 거느렸던 건봉사는 1906년 관동지방 최초로 신학문 학교인 봉명학교를 세웠다. 봉명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은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나서기도 했으며, 건봉사는 우수한 학생들을 서울이나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주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정남용 등을 비롯한 많은 인재들과 불교지도자들을 배출하였다.

건봉사는 독립운동가이며 승려인 만해 한용운의 활동무대였다. 만해는 자주 이곳을 찾아와 청년들에게 강연을 했으며, 1928년에는 건봉사사지를 직접 편찬하기도 했다.

1878년 4월 삼천여칸의 사찰을 태운 대화재, 사명대사 기적비를 부숴버릴 정도로 눈엣가시로 여긴 일제의 탄압,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 치하도 겪어낸 건봉사는 민족 상잔의 6.25 전란만큼은 끝내 이겨내지 못했다.

1951년 5월 10일 유엔군의 대대적인 폭격으로 건봉사 대웅전 일대 모든 전각이 전소되었다. 이후 휴전까지 건봉산 일대는 총 16차례나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펼쳐지면서 건봉사는 국군의 주둔지가 되었다. 포화 속에서 살아남은 건물들은 군인들이 난방용 화목으로 뜯어내면서 모두 사라져 버렸으며, 1954년 9월에는 주둔 국군의 실화로 낙서암 일대의 건물이 모두 불타버렸다. 전쟁이 끝나고 700여칸의 전각은 모두 사라져 폐허가 되었으며, 오직 불이문만이 남았다. 건봉사 출신 고승의 진영 44점도 사라졌으며, 불상을 비롯해 사명대사의 유품과 왕실 하사품 등 귀중한 문화재도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30년이 흘렀다. 비무장지대라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되어 사명대사의 행적을 적은 기적비를 비롯한 비석들이 쓰러지거나 개울가에 처박힌 채로 방치되었다. 1986년 6월에는 부처 진신치아사리가 도굴되어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으며, 총 12개의 사리 중 8개만 회수되었다. 그동안 잡초는 우거지고 소나무 남벌로 사찰 경내는 더 황폐해졌다.

건봉사가 민통선에서 해제된 것은 1989년. 다음해 지표조사를 시작으로 복원사업이 시작되어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 15동이 복원되었지만 옛 모습을 되찾기에는 아직 멀기만 하다.



6.25 전란에 유일하게 남은 불이문

건봉사에는 부처님 진신치아사리 8과를 비롯해 경내에 자리잡은 보물 제1336호 능파교, 사찰 진입로에 위치한 보물 제337호 육송정 홍교, 6.25 전란에 유일하게 남은 강원도 문화재 제35호 불이문과 사명대사 기적비, 비석과 부도탑 등 문화재가 다수 남아 있다.

건봉사 경내로 들어서면 바로 불이문(不二門)이 눈에 들어온다. 진리는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으로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고 생과 사, 만남과 이별 역시 근원이 모두 하나라는 것이다. 불국토로 들어서는 해탈의 문이라고 하여 번뇌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성속(聖俗)의 경계를 이루는 곳에 성속의 경계를 허물어 하나임을 일깨우는 게 아닌가 싶다.

1920년에 세웠다는 불이문은 유일하게 원형이 남아있는 목조건물이다. 다른 사찰의 불이문과는 달리 건봉사의 불이문은 팔작지붕을 4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다. 나무 기둥 아래 돌기둥에 금강저 문양이 선명하다. 불이문의 현판은 해강 김규진의 명필로 유명하다. 화가이며 서예가인 해강은 영친왕의 스승으로 영친왕이 일본에 끌려가자 복잡한 화법의 그림을 포기하고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문인화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금강산 구룡폭포 암벽에 새겨진 미륵불(彌勒佛) 글씨도 그의 작품이다.

불이문을 지나 오르면 계곡을 가로지르는 수려한 돌다리를 만난다. 무지개 다리인 홍예교의 전형을 보여주는 능파교. 능파교란 고해의 파도를 헤치고 부처의 세계로 가는 다리라는 뜻이다. 이 다리는 처음 능파교로 이름 지어졌으나 1747년 무너진 다리를 복원할 때 산영교라 하였다. 능파교는 2002년 국가 보물로 지정되어 2005년 보수하였다. 그러나 원형복원에 대해서는 논란이 일었다. 2003년 건봉사의 모든 사료를 정리하여 『금강산건봉사사적』을 발간한 이영선씨는 “능파교는 1747년 중건될 때 미려한 난간이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난간이 없어졌다”며, “원형 그대로 복원을 한다고는 했지만 난간을 빠뜨렸다”고 지적했다.

능파교를 건너면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석주가 눈에 띈다. 십바라밀 석주. 생사의 고해를 건너 열반의 세계에 이르게 하는 10가지 수행 덕목을 둥근달과 반달, 가위, 금강저, 구름 등의 상징물을 통해 표현했다. 

 

건봉사 능파교(산영교)의 1940년대 모습, 다리 난간이 선명하게 보인다.
건봉사 능파교(산영교)의 1940년대 모습, 다리 난간이 선명하게 보인다. 

2005년 복원한 후 능파교 모습. 옛 사진에 있었던 다리 난간이 없다.
2005년 복원한 후 능파교 모습. 옛 사진에 있었던 다리 난간이 없다. 

 

부처님 진신치아사리 모신 불교성지

건봉사는 부처님 진신치아사리를 모신 불교성지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통도사에서 빼앗아간 것을 사명대사가 일본에 건너가 되찾아와 진신사리는 통도사에 돌려주고 치아사리를 건봉사에 봉안하였다. 1986년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건봉사에 도굴꾼들이 대학 문화재 복원조사단이라고 속이고 들어와 치아사리를 훔쳐 달아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진신치아사리는 전세계 15과 중 스리랑카에 3과, 우리나라 건봉사에 12과가 있다. 잃어버린 치아사리 중 8과는 찾았으나 4과는 끝내 찾지 못했다. 건봉사는 5과는 일반인들이 친견할 수 있도록 하고, 3과는 적멸보궁 사리탑에 모셔 봉안하고 있다.

건봉사에는 다른 절과 달리 두개의 시비가 서 있다. 하나는 건봉사 출신으로 1930~40년대 대중가요 작사자로 이름을 날리던 조영출(조명암)의 시비, 다른 하나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만해 한용운의 시비이다. 만해는 남한을 대표하는 시인이라면 조영출은 월북한 북한 최고의 예술인이다. 건봉사와 인연을 맺은 두 문인의 시비를 통해 건봉사는 민족분단의 아픔을 딛고 화해와 통일을 이루자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남북 화해의 길이 멀게만 느껴지는 지금, 천년 고찰 건봉사에 들러 다시금 분단과 통일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엄경선(프리랜서 기자) 설악신문 2012년 8월 20일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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